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케 칸 (문단 편집) == 생애 == [[칭기즈 칸]]의 4남인 [[툴루이]]의 큰아들이자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 일 한국의 창시자인 [[훌라구]]의 큰형이다. 젊은 시절에는 [[금나라|대금]] 전쟁과 서방 원정에 참여해 상당한 전공을 세웠다. 사촌인 [[귀위크 칸]]이 사망한 후 [[주치]] 가(家)의 [[바투]]와 제휴하여 [[쿠릴타이]]에서 칸의 자리에 추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모친 소르칵타니 베키의 정치력이 상당히 발휘되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아들 몽케의 칸 즉위를 위해 [[바투]]에게 오고타이 군대의 동태를 전달하는 등 주치 울루스와의 친밀한 관계를 다져나갔고 [[툴루이]]가 보르테 소생[* 칭기즈 칸에게는 여러 부인들이 있었지만, 첫째 부인인 [[보르테]]의 자식들만이 재산을 받았다. 딸들도 몽골에 복속된 [[오이라트]], [[위구르]] 등의 수장과 혼인을 해서 각 세력들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잡았다. 물론 칭기즈 칸이 총애하던 부인 중 일부는 몇몇 [[강]]을 분배받기도 하였다.][* 정확하게는 몽골의 분배방식에 따라서 몽골의 초지와 대부분의 인원들은 막내 툴루이가, 서쪽의 가장 먼 초지에서부터 일부 인원을 받은 형태로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가 받았고, 동쪽은 [[동방 3왕가|자신의 동복형제들에게 분배하였다.]] 여기에 보르테 소생의 딸은 혼인한 지역에 공동 통치자가 되었고, [[보르테]]는 칭기즈 칸의 정실로써 이미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밑에 다른 일부 아내들이 몇몇 강을 받았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아들들에게 분배된 것은 초지였고, 정주 지역들은 공동 통치 구역으로 그곳에서의 수익은 [[예케 몽골 울루스]] 전체의 수익이었다. 그러나 우구데이가 대칸에 오르면서 자신의 권력을 확고하게 하는 과정 속에서 우구데이 가(家)의 독주와 공동재산 사유화는 점차 주치 가(家), 차가타이 가(家), 툴루이 가(家)에서도 시행되면서 1차적으로 우구데이 가(家)의 귀위크 사후 툴루이 가(家) 몽케의 즉위와 주치 가(家)의 독립적인 권한 보유를 불러왔고, 이후 [[쿠빌라이 칸|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와의 대립 속에서 서부의 3가(家)가 독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의 아들 중 말자임을 골자로 툴루이 가(家)의 정통성[* 당시 몽골족의 재산 분배는 막내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지역을 받고, 맏이가 가장 먼 지역을 받았다. 칭기즈 칸도 몽골제국 영토 중 몽골초원에서 서쪽으로 가장 먼 킵차크 초원에서부터 순서대로 주치-차가타이-오고타이에게 분배하였고, 막내인 툴루이가 몽골초원을 받았다. 그외에 동쪽의 만주지역은 동복동생 3명에게 분배하였다.]을 주장했다. 따라서 툴루이가 가장 많은 몽골족 인원과 재산을 받았는데[* 이때문에 칭기즈 칸 사후에 쿠릴타이에서 오고타이를 선출하기 전까지는 툴루이가 대칸을 대리하였다.], 이후 대칸이 된 오고타이는 툴루이 소유의 재산을 빼앗고자 한 것으로 추측된다.[* [[카라코룸]]의 위치 자체도 툴루이의 분배지역으로 보이며, 우구데이 시절 동원된 병력도 대부분 툴루이의 관할이였고, 툴루이 사후 소르칵타니-베키를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키고자 한 것에서도 그렇다.] 사실 대칸은 분배된 초지를 제외하고, 정주지역등 분배되지 않고 공동으로 관할하는 곳들을 직접 통제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오고타이는 야금야금 이를 어겼다. [[바투]]는 귀위크 칸 사망 직후 툴루이 가(家)와의 연대감을 공공연하게 표현했다. 1250년 알라카마크에서 툴루이 가(家)와 주치 가(家)의 주도 아래 쿠릴타이가 개최되었으나, 반대 세력의 비판을 의식해 오난 - 케틀란 지역에서 즉위 후 쿠릴타이를 재소집한다. 1251년 여름 쿠데우 아랄에서 모든 가문이 참석한 공식적인 쿠릴타이가 개최되었고 [[몽골]] 4대 대칸으로 추대되었다. 쿠데우 아랄은 1206년 [[칭기즈 칸]]이 쿠릴타이를 연 곳으로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 몽케가 [[바투]]의 지원을 받아서 카간이 되었기 때문에, [[바투]]의 울루스는 독립적인 위치를 갖게 된다.] [[파일:조어성 중국.jpg]] [[충칭]] 외곽 허촨 (합천)구의 조어성 동생 [[훌라구]]로 하여금 중동 지방을 침공하게 하고, 동생인 [[쿠빌라이 칸]]으로 하여금 [[남송]]을 치게 했지만, 쿠빌라이가 독립적인 세력으로 움직이려는 모습을 보이자 쿠빌라이를 뒤로 물리고 본인이 쳐들어갔다가 성도를 비롯한 [[쓰촨 성|사천]]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여기서 [[왕덕신]]이 이끄는 군대가 선봉으로 활약했다.], 합주 조어성에서 왕견과 그 부장 장각의 방어에 막혀 병[* 이질이라고 추측된다.]을 얻었고 사망했다. [[조어성 전투]] 참조. [[남송]]의 격렬한 반격에 의해 화살을 맞고 조어성에서 전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몽케 칸이 이끌던 우익군의 장수들 다수가 남송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걸로 봐서 병사가 아닌 전사일 가능성도 없진 않다. 그의 즉위 과정에서 몽케의 후견인 격이었던 바투와 귀위크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바투가 [[귀위크 칸|귀위크]]를 살해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다. 이 부분은 그의 어머니인 소르칵타니 베키와 연관이 있는데 그녀가 귀위크가 바투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나가자 바투에게 편지를 보내 경고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위크가 병사한 일화 때문에 나온 주장이다. 기독교, 정확히는 [[경교]]를 믿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가 경교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였지 몽케 그 자신은 기독교도가 아니였다.[* 몽케는 동복 형제들과 달리 텡그리 신앙을 숭배했던 걸로 알려져 있다.] [[툴루이]]의 후손들이 [[오고타이 칸]]의 시대에 엄청난 핍박을 받은 탓에 툴루이 울루스는 제자 울루스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았다. 바투가 귀위크 칸 사후에 몽케를 칸으로 세운 까닭 역시 이 때문이었다. 바투는 '얘들은 너무 약하니까 내가 몽케를 칸으로 세우면 몽케는 내게 의지하느라 주치 울루스에 참견 못 하겠지' 정도 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귀위크 칸의 시대부터 바투가 잘 나가서 반독립적인 칸국을 세웠다고 세간에는 알려져 있는데, 이는 몽케 시대의 일을 소급한 것이다. 단, 몽케 시대에도 바투의 권한은 해당 울루스 소속의 유목민들에게 한정된 것이었다. 하위 칸들의 권력이 정착민들에게도 행사된 것은 쿠빌라이 칸 시대 이후의 일이다.] 단 바투는 예전부터 귀위크를 위시로한 오고타이[* 삼촌 오고타이 칸 자체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는데 그 후손들과의 사이는 나빴다. 귀위크는 오고타이의 아들이다.], 차가타이 쪽과 사이가 안 좋았다. 서방 원정 도중에는 대놓고 귀위크가 술자리에서 깔본 일도 있었고 한 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차가타이가 주치를 아버지 면전에서 대놓고 무시했던 일도 있다. 심지어 귀위크는 바투를 정벌하려는 찰나에 사망해버렸으니... 몽케의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도 한몫해서 이미 예전부터 이런 바투와 귀위크의 알력 다툼을 알고 따로 라인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툴루이 가문이 상당히 약했기 때문에 몽케는 즉위 후 곧바로 숙청을 행하게 했다.[* 복수의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당장 아버지인 툴루이의 일도 일이고, 큰 아버지인 오고타이는 아예 어머니인 소르칵타니 베키를 자기 아들인 귀위크와 혼인시키려고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가 이 순간을 위해 이를 갈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리하여 몽케가 행한 숙청은 몽골 제국에서 전무후무한 규모였다. 집사에 의하면 최고위층의 77명이 사사되었다. 특히 [[칭기즈 칸]]으로부터 왕권을 영구히 부여받은 오고타이계가 당한 숙청이 대표적이었다.[* 전대인 귀위크 칸이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을 추구한 결과 오고타이계는 인망을 잃었다.] 그래서 그들을 보호하려는 몽골 귀족들이 없었다. 이후 오고타이의 후손들 중 가장 잘 나간 인물이 바로 [[오고타이 칸국|우구데이 울루스]]의 [[카이두]]였는데, 그나마 카이두도 차가타이 울루스의 바락이 몰락하기 전까지는 반 쿠빌라이파 가운데 최약체였다. 이것이 의미가 있다면, 그동안 칭기즈칸의 피를 이은 일명 황금 씨족을 공개적으로 숙청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는데, 몽케는 이 숙청을 단행하면서 권력 기반을 다지는 한편, 이 숙청을 뛰어넘을 업적을 이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기에, 급하게 남송 정벌을 서두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충분한 준비 없이 남송 정벌을 단행하게 되었는데, 중간에 한 군을 이끌어야 하는 만주의 타가차르는 약탈 문제로 양양을 공격하다가 휙 돌아가버리고, 결국 자신이 좌천시켰던 동생, 쿠빌라이를 다시 부르는 등 시작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하더니, 사천 지방에서는 성도를 점령하고는 1년도 넘게 고전하게 된다.[* 이게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이쪽이 엄청나게 더울 뿐 아니라 지형도 험난한 곳이라 몽골군이 불리할 수 밖에 없는 지형인데다가, 수비군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했고, 돌아간 타가차르 대신 다시 데려온 쿠빌라이는 아주 느릿느릿 진군해서 몽케를 고립시켜버린다.] 많은 장군들이 퇴각을 건의했음에도 듣지 않다가 결국 그 자신이 사망하게 된다. 그의 치세 때 [[프랑스]]의 사자 자격으로 온 사제가 있었고, 그는 몽케 칸에게 교황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했지만, 몽케 칸은 당연히 그런거 신경쓰지 않았고[* 당시 몽골 제국은 세계 최강이라 봐도 좋을 정도였다.] 대신 기독교 사제들과 이슬람 교도들과 불교 승려들로 하여금 토론으로 서로 겨루어 보라고 시켰다. 이 세 종파들은 서로를 성공적으로 교화시키지 못했고, 결국엔 기독교인들이 마유주를 마시다 취해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하고, 무슬림들은 질세라 쿠란을 외우고, 불교도들은 조용히 명상을 시작했다.[* 당시 몽골의 관습에선 싸움이 끝날때 마다 마유주를 한 잔씩 마시는 것이 있었는데, 그 관습에 따라 토론이 한 회전씩 끝날때 마다 마유주를 한 잔씩 마셨고, 기독교인들이 먼저 취해버리는 바람에 정상적인 토론이 불가능해지자, 기독교도들은 찬송가를 불러대고, 불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은 명상과 코란 암송으로 대응한 것.] 그리고 이 프랑스인 사제가 돌아갈때 몽케 칸은 '''신이 손에 다른 손가락들을 내려주셨듯이 인간에게도 다른 방식들을 내려주었다'''며 몽골인들의 포용성을 설파했다. 근데 중국의 다른 기록을 보면, 그 뒤에 스님에게 가서 '''"다른 종교가 손가락이라면, 불교는 손바닥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는 막내 동생인 [[아리크부카]]를 아껴서[* 심지어 어머니조차도 무척 아꼈다.] 자기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그가 죽은 후 계승 다툼에서 승리한 것은 생전 그가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했던 바로 아랫 동생인 쿠빌라이였다. 그의 아버지인 툴루이가 막내였고, 친 형제인 오고타이에게 제거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원조비사]]에 따르면 금나라가 멸망한 후 오고타이가 죽을 병에 걸리자 툴루이는 자기 목숨과 맞바꿔서라도 오고타이를 살려 달라고 하늘에 기도했고, 얼마 후 오고타이가 살아나자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툴루이가 한때 대칸 후보로 거론된 적도 있어서 사실은 오고타이와 퇴레게네, 테무게 옷치긴에게 모살당한 게 아니냐는 설이 있다.] 심지어 방식도 비슷하게 죽었다. 참으로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